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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수는 보복이 아닌 용서

크리스천헤럴드 2010. 10. 28. 13:35

진정한 복수는 보복이 아닌 용서

전주서문교회 김승현목사 컬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단지 원수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용서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수를 용서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인의 한 예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태계 미국의 한 기독교인이 딸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중에 아버지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쏜 총에 머리를 맞아 관통함으로 그만 현장에서 직사(直死)했습니다. 수사는 사고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지 못해 장기전으로 돌입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소녀는 귀국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할 마음으로 생활 히브리어와 현지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파견 근무를 자청, 그곳에 가 있으면서 법원의 기록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2년에 걸쳐 아버지를 살해한 테러범이 ‘오마르 하티브’라는 사실과 그가 수감되어 있는 곳을 파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 갚을 기회가 왔습니다. 그녀는 그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테러범과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그동안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던 것에 대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차원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바로 ‘롤라 블루멘펠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돌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이 한국 기독교의 사랑을 대변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기 마련이고, 용서는 용서를 낳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면 ‘바드야쉼’이라는 추모박물관이 있습니다. 독일 나치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역사적인 사실을 교훈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모두 잊어버리시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그 실천자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류(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